Garut를 다녀온 일정이 4/30 ~ 5/1 이니 1개월이 훨씬 지났다.
이나라도 한국과 다르지 않게 4월과 5월은 유닌히 휴일이 많은 나라이다.
3일 연휴를 집에만 있기 참기 어려운 시간이어 주위 사람을 수배하여 Garut을 함께 나섰다.
언젠가 한국서 지방을 다니다가 두문동이라는 곳을 지나면서 이 곳의 유래를 생각하고 그 옜날 참 접근이 어려웠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펌글]
두문동(杜門洞)은 조선 시대 성거산 서쪽에 고려가 멸망하자 과거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두문불출한다하여 두문동이라고 불리었다.
Garut을 가서 처음 찾은 곳은 Kampung Naga이다.
Kampung naga는 전통을 고수하며 사는 마을이다.
현대 문명의 이기 중 가장 혁신적이고 편한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마을....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호롱불을 사용하는 마을...
무슨 이유일까?
마을 입구 기념물이다.
"칼을 보관한 기념물"이란다.
좀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여 안타깝다.
단체여행 온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데 한 컷 담아보았다.
반둥에서 욌다한다.
도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439계단 계단과
마을로 들어가는 소롯길이다.
.
계단 입구에 조잡한 표지석이 있는데
글이 다 지워져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마을의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일반 마을과 다를 것이 없으나 지붕이 전부 초가로 된 것이 특이하다.
공동 방아간이다.
다양한 쌀을 찧고 있는데 모두 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네 조상들이 사용했던 물레방아나 가축을 이용한 절구 등은 볼수가 없었다.
현지인이 사는 방의 모습이다.
기름을 사용하는 호롱이 있는데 기름은 정부에서 공급을 받는다 한다.
우리가 어릴 떄 보았던 심지를 넣어서 사용한 호롱이 아닌 개량된 호롱이다.
박으로 만든 휴대용 물통인데 오랜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다.
부억과 아궁이의 모습이다.
음식을 끓이기 위한 아궁이와 연기가 빠져 나가기 위한 외벽이다.
대나무 껍질을 벗겨 만들어잔 벽이 통풍이 원활 할 것 같다.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손으로 대나무 그릇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반세기 전 시골마을의 농한기 때 가마니를 짜거나 직물을 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낮선 이방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니 수줍어 한다.
지붕은 우리나라 초가지붕 같은데, 그재료가 다양하다.
볕짚, 야자나무 잎, 생강나무 잎이 사용된단다.
염소 축사이다.
가축의 냄새는 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밖에 나간 것 같다.
화장실이다.
우리나라 화장실과는 그 기능이 좀 다르다.
볼일을 보는 곳이기도 하고 빨래도 하고 샤워를 하기도 한다.
더운 나라에서 웬 땔깜?
취사를 위한 준비일까?
인도네시아에서 땔감으로 가장 편한 야자껍질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Masjid이다.
그런데 지붕위에 Masjid의 상징인 초생달과 칼의 모습이 안보인다.
주민보다 관광객을 위한 느낌이 든다.
북은 대나무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고 한쪽은 열려있다.
곡물 창고이다.
서생원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물위에 지었다 한다.
마을서 만난 노인으로 75세라 한다.
젊은이들과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이보다 정정하다.
마을 중간에 있는 쓰레기 통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이 앙징맞다.
손가락 그림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계단 중간에서 관광객을 위한 마을의 모습을 손가락으로만 그려 팔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와룽이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박소를 시켰는데 제법 먹을만 하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중간에 만들어져 전망이 좋고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휴게공간이 인상적이다.
Kampumg Naga
지금부터 이글은 가이드의 말을 전하는 것과 내 생각을 첨언한다.
500여년 전 주이네들은 인적이 닿지 않는 이곳 골짜기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주위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삶을 꾸려온지 500여년
나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왜 이들이 이곳에 터를 내렸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는데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아마 그 엤날 500여년 전에 이곳에 이들이 들어섰을 때는 깊은 골짜기로 외부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이네들은 다른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했을 것 같다.
지금은 마을 근처로 지나는 도로가 생겨 관광지화 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네비를 찍고 가다보니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가다가 길이 끊어졌다.
묻고 물어서 찾아가니 대형버스와 승용차 등을 주차하는 제법 큰 주차장이 있었다.
들어가니 한사람이 접근하는데 가이드라며 본인이 안내해야만 한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데 주차장에서 내려가는 계단이 제법 많았는데 439계단으로 1987년에 정부 지원으로 콘크리트로 개선하여 문명을 거부하고 사는 마을의 느낌이 많이 퇴색되었다.
1956년 화재가 발생하여 재 건축하였다.
조명용 기름은 정부서 지원받고, 정부가 전기를 설치해 주겠다 했는데 주민들이 거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타지인과 결혼도 가능하지만 집지을 공간이 없어 원한다고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집에서 직계로만 물려받아 살 수 있다 ,
가족 구성이 102 부모로 전체 인구가 300명으로 어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단다.
젊은이들이 밖에서 들어와 살고 싶어한다 하여 이유를 물으니.... 갈등과 경쟁이 없고 서로 협력하면서 살기가 편한 것이 이유라는데.... 우리처럼 문명의 이기에 물든 사람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
아이러니하게 학교는 외부(전통 이슬람)로 다니고
촌장은 직계로 이어지며 무덤은 마을 근처에 쓴다,
병원은 근처 15km 정도에 있으며 웬만한 병은 마을 내부에서 처리하고 필요한 경우만 병원을 간다.
Masjid도 초생달의 표식이 없어 일부러 관심있게 보지 않으면 구분이 안된다.
내 느낌으로 내부인을 위한 것 보다는 외부 관광객(인니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어떻게 된 것이냐 물으니 외부와 연락을 맡은 사람이고 충전은 마을 밖에서 한단다.
마을에는 외부인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은 없고 마을 입구 계단 옆에 민박을 하는 집들이 눈에 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 본인은 안에 살지 않고 밖에(입구) 산다고 한다.
계곡이 깊지는 않으니 제법 길었는데 비가 많이와 홍수에는 문제 없는가 물어보지를 못하였다.
찾아 갈 때는 못 느꼈는데 Kampung Naga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보니 계곡이 길게 이어지면서 양쪽으로 계단식 논이 많이 있다.
일반인은 많이 살지 않는 것 같으니 이 논이 전부 이들의 논이라면 그 생산량은 제법 많을 것 같았다.
Guide가 왜 조상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았는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는데 모르는 것 보다 말을 안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계속 물으니 마지못해 500년 전 쯤 이라한다.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들어온 시기와 얼추 일치하는 것 같다.
내 생각은 그 옜날 흰두교인들이 이슬람을 피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뿌리 내리고 정착한 것같다. 이들이 문명을 거부하고 산다 하지만 관광객을 위한 음료수 진열대와 프라스틱 용기, 방바닦에 비닐 장판 등을 보면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이 이 골짜기에 들어선 것이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기 위하여서가 아닌 그들의 사상(종교)을 간섭받는 것이 싫어서 정부에서 준다는 혜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인도네시아를 다니다 보면 전통가옥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 곳은 전부 인도네시아 전통가옥이다.
이 마을의 전통이 얼마나 이어질까...
마을 아이들이 외부(이슬람) 학교를 다니면서 교육받으니 언젠가는 이들의 모습이 점점 희석되 가겠지.......
벌써 많은 부분 희석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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