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9

정치권 인사들의 명암을 보면서...

정치권 인사들의 면면을 보다 보면 극명하게 명암이 대비된다. 보수의 대들보라는 국민의 힘 또는 검찰의 기득권 층들은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일들을 벌이고도 뻔뻔하게 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버젓이 살아간다. 왜? 그들은 황금만능 사회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어릴 때 부터 부모들에게 그렇게 되었을 때 빠져나가는 방법을 직간접적으로 배워왔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힘 있는지 알고 항상 그들의 주위에서 맴돈다. 그게 없는 죄도 만들고 있는 죄도 없애주는 검찰이다. 대표적으로 거니 모녀가 검사를 옮겨 다니고 검찰 주위에 맴돌며 동아줄을 잡고 온갖 사기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이 사회의 기득권으로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 또 법무차관을 지낸 김학의는 성매수를 한 동영상이 있어 경찰이 분명 김학의로 지명을 해도 ..

나의 이야기 2025.01.29

백수의 시작

군 제대 후 아니 고등학교 졸업 후 잠깐씩 쉬기는 했어도 50년 넘도록 한 직장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5년 넘게 근무한 플렌텍에서 하던 프로젝트에서 금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 없이 계약이 종료되었다. 올 상반기까지 일해 여행 경비를 충당하고 내년에 태어날(?) 손자를 맞을 준비하려 했는데 계획이 어긋났다. 그나마 용돈을 모아 주식에 투자한 자금도 경기가 나빠 손해를 보고 있으니 경기가 회복 될 때를 기다려 보자. 포스코에 입사하기 전 직장생 활도 있었지만 포스코에서 근무한 31년의 세월이 나름 내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결혼과 자녀 출산과 결혼 등 아직 아픈 손가락이 있어 편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도 제 삶을 제대로 살고 있고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포..

나의 이야기 2025.01.29

형식(形式)이 본질(本質)을 지배한다.

젊은 시절 이 문구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다.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느낀다.막내아들이 초딩 4년 때 해군서 전시하는 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고자 하여 담임교사를 만나러 아들과 함께 가는데 아들 왈 "아빠! 양복 없어!"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당시 학교는 지척에 있었고 나는 아무 생각없이 가벼운 잠바차림으로 나섰는데 어린 아들이 지 아빠가 양복을 버젓이 입고 갔으면 했나 보다.대답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지는 않는데 가볍게 이야기 하며 본질이 중요하다(?) 했지 않았나 싶다.우리는 가끔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 할 때가  있다. 그러다 오탈자가 나오면 보고 받는 사람의 지청구가 있거나 그냥 지나치기도 하는데 지청구가 있으면 보고받는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은 안 보고 한..

나의 이야기 2024.12.04

내새끼 지상주의

나는 지방 소도시의 400세대가 조금 넘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파트 놀이터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들리고 제일 높은 층에 살다보니 통로의 아이들을 다 만난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면 똘똘하게 대답하고 대부분 내릴 때는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다.최근 사회문제가 된 젊은 부모들의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눈쌀이 찌푸러 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우리나라 식당이나 카페 등에 노키즈 존이 많은 것도 이 극성스런 젊은 부모들의 무조건적인 자식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방송에 의하면 업주들이 어린이들을 못 들이게 하는 것은 안전사고가 났을 때 발생하는 문제라 하여 서울에서는 그러한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보험도 생겨났다 한다.얼마전 어느 식당에 아이들을 데려와..

나의 이야기 2024.12.04

지금 안하면 못한다!

지난 봄부터 그동안 미뤄놨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인도네시아 근무후 귀국 한 2019년 거의 10년 동안 안타던 자전거를 닦아 보니 탈만하여 헬멧과 고글을 장만하여 동네를 돌아보다 그해 한 여름 8월 6일 그해 최고 더운 날 자전거를 타고 화개장터를 향했다.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였다. 6 년 만에 귀국하고 나서는 자전거길을 제대로 몰라 가야산 중복도로를 넘어 진월로 해서 망덕을 들어섰으니 얼마나 돌아서 갔는지...돌아 올 때도 마찬가지로...그 것도 해가 중천인 7시 반에 출발하였으니....암튼 거의 빈사 상태로 귀가하였고 그 뒤로 안 타다 5년 만인 금년 봄 부터 다시 시작을 하였다.기존 자전거는 체대가 알미늄으로 가벼워 나름 탈만하여 자전거길을 여러번 사전 답사 후 맘먹고 화..

나의 이야기 2024.12.04

금연에 대한 단상(斷想)

옛말에 "하다가 중지하면 아니한만 못하다" 라는 격언이 있는데 "금연은 한 만큼 이익이 있다"나의 지론이다.혹자는 "담배를 끊었다 다시 피면 더 많이 핀다." 던가 "살이 찐다." 던가 하며 다시 피는 이유를 대는 사람이 많이 있다.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중요한 것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금연을 실행하지 못하는 핑계인 것이 문제다.나 자신도 일찍 담배를 배워 수차례 금연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마지막 금연 날이 1991년 7월1일이었으니 벌써 34년 차이다.마지막 금연 하기 전 1년 반을 금연했다가 1년 열심히 피운 후 1991년 7월 1일이 되었는데 마침 담배가 떨어졌다.그 때 문득 든 생각이 한해의 반년이 지났는데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책감이 들며 세가지를 결심하였는데 지금..

나의 이야기 2024.10.21

일본과 뉴라이트에 대한 우려

일본이 섬나라인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들이 막부 300년 동안 쇼군의 치하에 살면서 번주(영주)제가 토착화 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섬나라인 관계로 거주 이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부 이전에 일본땅은 전국이 싸움터였으며 싸움터인 일본의 전국을 평정한 사람이 가등청정이고 그 뒤 풍신수길이 정권을 잡고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벌인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막부 시절의 일본은 쇼군 및 번주 밑의 사무라이 계급 층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막부시대의 번주는 백성의 수가 번주의 힘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거주이전에 대한 자유는 물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농경사회인 당시의 일본 땅의 각 번의 번주와 그들의 아래에서 근무하는 사무리..

나의 이야기 2024.09.03

궁합(宮合)에 대한 사연

요즘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결혼상대를 고를 때는 꼭 궁합이란 것을 보았다. 묘한 것은 결혼 상대의 적합성을 확인하는 것인데 한쪽은 궁합이 좋다 하는데 한 쪽은 궁합이 나쁘다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우리나라에 결혼을 앞둔 남녀에 대한 "궁합"이 도입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라는 가친(家親) 생전의 이야기가 생각나게 하는 현상이다. 가친의 어린시절 고향에 친척 중 천석지기 부자가 있었는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닭을 천마리 잡고 궁합이 좋다는 사위감을 봐 혼인했는데 1년 만에 사위가 요절했다 하시면서  조선에 궁합이라는 것이 들어 오게된 유래로... 병자호란 이후라 하셨다. 병자호란은 중국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쑥대밭을 만들었던 전쟁으로 남한산성의 삼전도 굴욕을 당한 조선의 처절한 전쟁의 하나로... 조..

나의 이야기 2024.09.02

추석과 벌초

해마다 추석을 앞둔 이 시기가 되면 집집마다 조상 묘소에 벌초하느라 바쁘고, 예초기 사고나 말벌에 쏘여 사망까지 했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곤 한다.우리 어머니는 서울 살 때 환갑도 안된 이른 연세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 망우리 공동묘지로 모시고 아버지는 병환 중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고향 선산 당신의 부모님(나에게는 조부모님) 산소 밑에 묻히고 싶다 유언하셔 당신의 뜻대로 모셨다.그러다 보니 부모님 묘소가 서울과 고향으로 나누어져 살아생전 애틋한 정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을 떨어져 지내시게 하다가 이십수년 만에 고향 선산으로 합장하였다.어머니 묘소 벌초는 아버지 생전에는 나나 형님이 부친과  다녀오거나 부친 혼자서 다녀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추석명절에는 가족 모두 모여 나들이겸 성묘를 다니곤 하였다.지금도 ..

나의 이야기 2024.09.01

라면의 추억

내가 라면을 처음 맛본 것은 초딩 5년 때인 것 같다. 당시 서울대를 다닌다는 5촌 조카가 처음 우리 집에 인사차 왔고 식사 대접을 위해 지난 봄에 미국에서 작고한 누님이 라면을 사오라 하였다.당시 라면 값은 16원인가 했던 것 같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연탄 한장과 같은 가격인 것으로 기억한다. 뭔지도 모르고 누나 심부름을 하였고 라면을 끓여서 조카에게 주었는데 어린 당숙(삼촌)이 쳐다 보는게 안스러웠는지, 아님 양이 많았는지 나에게 덜어줘 먹은 그 맛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혓끝에 맴돈다.어렵게 살던 시절 고기 맛에 굶주려 있었던 어린 나에게 닭고기 맛을 풍기는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라면이 서민들의 식사 대용이 된 것은 고딩 때 쯤인 것으로 떡국 떡과 함께 자주 먹었고 떡복이와 함께 분..

나의 이야기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