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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새끼 지상주의

나는 지방 소도시의 400세대가 조금 넘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파트 놀이터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들리고 제일 높은 층에 살다보니 통로의 아이들을 다 만난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면 똘똘하게 대답하고 대부분 내릴 때는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다.최근 사회문제가 된 젊은 부모들의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눈쌀이 찌푸러 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우리나라 식당이나 카페 등에 노키즈 존이 많은 것도 이 극성스런 젊은 부모들의 무조건적인 자식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방송에 의하면 업주들이 어린이들을 못 들이게 하는 것은 안전사고가 났을 때 발생하는 문제라 하여 서울에서는 그러한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보험도 생겨났다 한다.얼마전 어느 식당에 아이들을 데려와..

나의 이야기 2024.12.04

지금 안하면 못한다!

지난 봄부터 그동안 미뤄놨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인도네시아 근무후 귀국 한 2019년 거의 10년 동안 안타던 자전거를 닦아 보니 탈만하여 헬멧과 고글을 장만하여 동네를 돌아보다 그해 한 여름 8월 6일 그해 최고 더운 날 자전거를 타고 화개장터를 향했다.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였다. 6 년 만에 귀국하고 나서는 자전거길을 제대로 몰라 가야산 중복도로를 넘어 진월로 해서 망덕을 들어섰으니 얼마나 돌아서 갔는지...돌아 올 때도 마찬가지로...그 것도 해가 중천인 7시 반에 출발하였으니....암튼 거의 빈사 상태로 귀가하였고 그 뒤로 안 타다 5년 만인 금년 봄 부터 다시 시작을 하였다.기존 자전거는 체대가 알미늄으로 가벼워 나름 탈만하여 자전거길을 여러번 사전 답사 후 맘먹고 화..

나의 이야기 2024.12.04

금연에 대한 단상(斷想)

옛말에 "하다가 중지하면 아니한만 못하다" 라는 격언이 있는데 "금연은 한 만큼 이익이 있다"나의 지론이다.혹자는 "담배를 끊었다 다시 피면 더 많이 핀다." 던가 "살이 찐다." 던가 하며 다시 피는 이유를 대는 사람이 많이 있다.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중요한 것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금연을 실행하지 못하는 핑계인 것이 문제다.나 자신도 일찍 담배를 배워 수차례 금연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마지막 금연 날이 1991년 7월1일이었으니 벌써 34년 차이다.마지막 금연 하기 전 1년 반을 금연했다가 1년 열심히 피운 후 1991년 7월 1일이 되었는데 마침 담배가 떨어졌다.그 때 문득 든 생각이 한해의 반년이 지났는데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책감이 들며 세가지를 결심하였는데 지금..

나의 이야기 2024.10.21

일본과 뉴라이트에 대한 우려

일본이 섬나라인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들이 막부 300년 동안 쇼군의 치하에 살면서 번주(영주)제가 토착화 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섬나라인 관계로 거주 이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부 이전에 일본땅은 전국이 싸움터였으며 싸움터인 일본의 전국을 평정한 사람이 가등청정이고 그 뒤 풍신수길이 정권을 잡고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벌인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막부 시절의 일본은 쇼군 및 번주 밑의 사무라이 계급 층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막부시대의 번주는 백성의 수가 번주의 힘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거주이전에 대한 자유는 물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농경사회인 당시의 일본 땅의 각 번의 번주와 그들의 아래에서 근무하는 사무리..

나의 이야기 2024.09.03

궁합(宮合)에 대한 사연

요즘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결혼상대를 고를 때는 꼭 궁합이란 것을 보았다. 묘한 것은 결혼 상대의 적합성을 확인하는 것인데 한쪽은 궁합이 좋다 하는데 한 쪽은 궁합이 나쁘다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우리나라에 결혼을 앞둔 남녀에 대한 "궁합"이 도입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라는 가친(家親) 생전의 이야기가 생각나게 하는 현상이다. 가친의 어린시절 고향에 친척 중 천석지기 부자가 있었는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닭을 천마리 잡고 궁합이 좋다는 사위감을 봐 혼인했는데 1년 만에 사위가 요절했다 하시면서  조선에 궁합이라는 것이 들어 오게된 유래로... 병자호란 이후라 하셨다. 병자호란은 중국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쑥대밭을 만들었던 전쟁으로 남한산성의 삼전도 굴욕을 당한 조선의 처절한 전쟁의 하나로... 조..

나의 이야기 2024.09.02

추석과 벌초

해마다 추석을 앞둔 이 시기가 되면 집집마다 조상 묘소에 벌초하느라 바쁘고, 예초기 사고나 말벌에 쏘여 사망까지 했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곤 한다.우리 어머니는 서울 살 때 환갑도 안된 이른 연세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 망우리 공동묘지로 모시고 아버지는 병환 중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고향 선산 당신의 부모님(나에게는 조부모님) 산소 밑에 묻히고 싶다 유언하셔 당신의 뜻대로 모셨다.그러다 보니 부모님 묘소가 서울과 고향으로 나누어져 살아생전 애틋한 정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을 떨어져 지내시게 하다가 이십수년 만에 고향 선산으로 합장하였다.어머니 묘소 벌초는 아버지 생전에는 나나 형님이 부친과  다녀오거나 부친 혼자서 다녀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추석명절에는 가족 모두 모여 나들이겸 성묘를 다니곤 하였다.지금도 ..

나의 이야기 2024.09.01

라면의 추억

내가 라면을 처음 맛본 것은 초딩 5년 때인 것 같다. 당시 서울대를 다닌다는 5촌 조카가 처음 우리 집에 인사차 왔고 식사 대접을 위해 지난 봄에 미국에서 작고한 누님이 라면을 사오라 하였다.당시 라면 값은 16원인가 했던 것 같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연탄 한장과 같은 가격인 것으로 기억한다. 뭔지도 모르고 누나 심부름을 하였고 라면을 끓여서 조카에게 주었는데 어린 당숙(삼촌)이 쳐다 보는게 안스러웠는지, 아님 양이 많았는지 나에게 덜어줘 먹은 그 맛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혓끝에 맴돈다.어렵게 살던 시절 고기 맛에 굶주려 있었던 어린 나에게 닭고기 맛을 풍기는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라면이 서민들의 식사 대용이 된 것은 고딩 때 쯤인 것으로 떡국 떡과 함께 자주 먹었고 떡복이와 함께 분..

나의 이야기 2024.08.17

처서 Masic

우리는 최근 매년 여름을 보내면서 올 여름이 가장 덥다한다. 아마도 앞으로 맞이하는 여름은 그래도 올해 여름이 가장 덜 더운 여름이 되지 않을까 싶다.기상청이나 환경전문가들은 탄소사용량이 많아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북극해 및 전세계 빙하가 점차 녹아 줄고 있으며 몇년 안에 해안가 저지대는 침수될 수 있다 하고 현재의 기온 상승추세라면 2050년에는 더워서 하계올림픽이 열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뉴스도 접해본다.내가 어릴 때 명태/동태가 가장 흔한 생선으로 서민들의 식탁에 올랐었는데 지금은 동해안에서 명태를 볼 수가 없다한다. 우리나라 김이 전세계 K-Food로 명성을 떨치며 수출하고 있는데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김 생산이 줄어들까 걱정이 되며 그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금년에는 지구촌 곳곳에 기상이변이 ..

나의 이야기 2024.08.13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마치고..

어수선한 국내 정치와 침체 일로인 경제와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숨통을 튀어주는  파리 올림픽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대한 체육협회는 출발 전 5개의 금메달을 예상했는데 금 13개(금은동 32개)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선전을 하였고 2024년 파리 올림픽에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선수단이 최소 인원인 21개 종목에 144명 참가했다 한다.왜 인원이 적었을까 생각해보니 국내 프로스포츠에 속한 구기 종목이 모두 출전을 못했다.(핸드볼은 프로가 없다)모든 국민이 열광하는 프로스포츼인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만약에 이 종목들이 한 종목이라도 출전했다면 몇 십년 만에 최소 출전인원은 안됬을 것이다.대부분의 메달 종목들이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아니면 국민들 뇌리에서 ..

나의 이야기 2024.08.13

사모곡

"어머니 어제밤 꿈에 너무나 ~~~~"가수 남진이 부른 사모곡의 첫 구절이다.젊었을 때 어머니를 그리며 부르던 노래로 언제 부터인가 내 뇌리에서 사려졌다가 얼마 전 시를 쓰는 지인이 발간한 시집 내용 중 도입부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과 추억이 그려진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부러워하며 내 뇌리 속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없다. 내가 13살 되던 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신 팃도 있지만 살아 계실 때도 함께한 추억이 없다.내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돈암동 재래 시장 한 가운데서 자리잡고 각종 계절 나물과 묵을 파신 것이 내 기억의 편린 속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1년중 설과 추석 명절을 빼고는 매일 새벽에 경동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와 정..

나의 이야기 2024.08.13